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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의 서사연구실 게시판입니다.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심상법 [ E-mail ]
  

서사학적 주석에서부터 설교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글입니다. Hermenia Today 제 7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글에 관한 연속 게제물을 보시려면 한국신학정보 연구원에서 발행하는Hermenia Today 목차를 참고하십시오. 제 3권부터 연재가 되었군요.

  • 글의 출처: http://www.iktinos.org(한국신학정보연구원)

    제자들의 전도 파송과 세례 요한의 수난/ 막 6:7-31


    본문(7-13절)의 전도 파송은 예수님의 제자 사역의 일환으로 이미 막 3:14에서 언급한 대로 '자신과 함께 함에 이은 '전도(훈련) 파송'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에 대한 전도 파송은 부활 후 제자들(교회)의 복음 전파(막 9:9)의 예비적인 행동 또는 범례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본 단락이 기술된 제자들의 전도 파송(7-13절)과 그들이 돌아와 전도내용을 보고(30절)하는 사이에 있는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14-29)는 이미 여러 번 필자가 언급하였던 대로 마가 특유의 사건 구성인 샌드위치 기법(sandwich technique)을 잘 보여준다. 마가는 이러한 사건 기술을 통하여 자신의 독특한 메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Wright 1985; Shepherd 1993): 열 둘을 보내심(7-13) - <세례 요한의 수난 기사> - 열 둘의 전도보고와 쉼의 명령(30-31).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본문의 장면을 갈등구조에 의해 분석하여 보면 아래와 같은 도표로 이해할 수 있다.

    장면 분석 <표 1>[이 부분은 위의 링크된 원문 참조하세요]

    사건의 발단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둘 씩 둘 씩 나누어 복음을 전파하러 보내심으로 시작된다(7절).

    그들을 보내실 때 예수님은 그들이 해야 할 규례들을 주셨다(8-11절). 이렇게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게 되었다"(12절). 이처럼 보냄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은 사건의 전개에 해당된다. 이제 열 두 제자들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이 헤롯왕의 귀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사건은 갈등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갈등의 국면). 복음전파로 세간에 무수한 소문들이 돌아다녔고 이에 대해 헤롯왕은 이 사건이 "[자신이]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는 것으로 결론지었다(절정). 여기에 마가는 이러한 헤롯의 결론에 대한 설명으로서 세례 요한의 수난과 죽음(순교)과 매장에 대한 기사를 회상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복음전파를 위해 파송되었던 제자들이 돌아 와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예수께 보고함(30절)으로 갈등의 국면은 그 절정에서 파국으로 전환되었고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잠깐 쉬게 하심으로 열 두 제자의 전도 파송의 사건은 종결된다(31절).

    물론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수난 기사(17-29절)를 따로 독립적으로 취급하여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막 6:7-31을 적절한 내러티브의 단위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러한 시도를 보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시 이 단락을 간단한 구조분석으로 이해한다면 여전히 그 중심이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C)임을 본다.

    A: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명하여 보내심(7-11절)

    B: 제자들이 나가서 전파함(12-13절)

    C: 예수의 이름의 드러남과 헤롯과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14-29절)]

    B': 제자들이 돌아와 보고함(30절)

    A':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명하여 잠깐 쉬게 하심(31절)

    구조 분석 <표 2>[링크된 원문 참조하세요]

    위의 교차-병렬적인 구조분석에서 보는 대로 이 단락의 메시지의 중심은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세례 요한의 수난 기사는 마가에 의해 일종의 회상형식으로 제자들의 전도 파송 기사 가운데 삽입되어 마가의 메시지(의도)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마치 제자들이 선교로 파송되고 다시 돌아오는 그 과정 가운데에 기술되어 제자들(교회)의 선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강한 범례로 제시되고 있다.

    2. 사건에 대한 이해

    위의 장면분석과 구조분석을 참조하여 본문의 사건(막 6:7-31)에 대한 내러티브적 주해를 하자면 다음과 같이 진행될 수 있다.

    1) 사건의 배경

    제자들의 전도 파송은 본문에 그 시간과 장소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일은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전도하러 여러 곳을 다니시던 중에 일어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2) 사건의 내용

    마가가 진술하고 있는 사건의 내용은 네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열 둘을 보내심(7-11절),

    (2) 보냄 받은 제자들(12-13절),

    (3) 돌아온 제자들(30-31절),

    (4) 파송 중의 기사: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14-29절).

    특히 네 번째의 기사는 전도 파송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 기사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1) 복음전파를 위한 지침들과 함께 열 둘을 보내심(막 6:7-11)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를 위해 열 두 제자들을 보내시는 모습 가운데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전도(선교) 방법의 적절한 범례(일종의 교범)를 엿볼 수 있다. 초기의 '부름기사'(1:16-20)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르셨다(막 1:17).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르신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먼저 자신과 '함께 하는 삶'(동행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막 3:14).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제자훈련 사역의 일환으로 복음전파가 그 중심에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후에 그들과 함께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는 예수가 오신 주된 목적(1:14-15; 1:38-39)이다. 지금의 전도파송은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나중에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있을 선교파송을 위한 예비적인 사역이다.

    이처럼 지금의 제자들의 전도 훈련은 미래의 제자들의 사역의 근간이 된다. 제자 삼는 사역에 있어서 훈련은 매우 중요한데 훈련이 없는 파송이란 존재할 수 없고, 파송이 전제되지 않는 훈련이란 무의미하다. 사실 이 둘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기본적 이해 가운데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모습(7절)과 그가 명하신 선교 규례들(8-11절)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전도(선교)의 지침들을 배울 수 있다: 권세; 전략; 규례.

    ● 먼저 제자들은 보내는 자(예수)의 권세를 위임받은 자들로서 파송되었다(7절)

    복음 전파를 위해 위임받은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말과 행동에 능력(권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능력)를 부여하신다(7절; cf. 행 1:8). 여기서 우리는 선교란 무조건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는다. 선교를 위해 제자들(교회)은 세속의 힘(돈과 권력 혹은 무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권세 있게 파송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제자들은 가기 전에 성령의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이점은 누가-행전을 통해서 잘 입증되었다("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신실하고 능력 있는 증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지배가 요구된다. 이처럼 그들의 위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임이다(하나님 예수 제자들; cf. 요 17:18).

    ● "둘 씩 둘 씩" 보내심(7절)

    '둘 씩 둘 씩' 짝지어 보내심은 유대주의의 법적인 관례로서의 증인의 신실성(신 17:6, 민 35:30)을 의미하며 또한 이것은 전도인들 상호간의 격려와 훈련과 보호의 차원에서 주어진다. 이점은 우리의 전도훈련에 있어서도 하나의 지침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그들을 둘 씩 짝지어 보내시며 명하신 예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한 규례들(8-11절)은 우리의 선교에도 훌륭한 범례로 이해된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 전도 여행을 위한 규례(8-11절): 여행 준비물과 숙박

    예수께서 명하신 규례들은 전도자로서 단순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함으로써 전도자의 삶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임을 시사해 준다.

    구령(救靈)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그 분이 보냈으면 그 분이 책임지신다. 보냄 받은 종은 보내신 주인에게 자신의 모든 복지(福祉)가 달려 있다. 전도자의 이러한 단순한 삶의 모습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첫째, 임박한 종말론적인 기대로부터와 둘째, 전도자가 장사꾼(이익집단)처럼 보여 복음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셋째, 하나님의 돌봄을 의지하는 태도로. 그 중에 세 번째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Gundry 1992:308).

    이러한 이해 가운데 예수께서 명하신 선교의 규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규례들 중에 '해야 할 것'은 지팡이를 들고 신을 신고 가는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양식과 돈과 두 벌 옷을 지니는 것이다. 특별히 '지팡이를 가지고 신을 신고 가라'는 마가의 언급은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10:10)는 마태의 언급과는 사뭇 다르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료(Q)의 차이나 단어(신과 샌달)의 의미의 차이, 그리고 기록 시기와 선교지역의 차이를 들고 있어나 이 모든 설명들이 완벽하지는 않다(Ibid).

    ◀ 여행 시에 지팡이를 지님

    흔히 여행자들이 지팡이를 가지고 가는 일은 관례적인 일로 사나운 짐승들로부터의 보호나 걸을 때 도움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별히 험악한 길을 갈 때 지팡이는 매우 요긴하다. 구약에서 지팡이는 출애굽 시에 하나님이 함께 함(인도하심)의 표(이적을 베품)로서 제시되기도 하였고, 또한 족장의 권위(민 17:2ff)나 선지자의 권위를 상징(왕하 4:29)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스라엘의 언약 갱신 시에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복과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겔 20:37; 37:15-18).

    ◀ "먼저 영접 받은 곳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라"

    도중에 더 좋은 장소가 제공되더라도 옮겨서는 안 된다(cf. 눅 10:7). 이 점은 보냄 받은 자들이 선교 자체에 헌신한 것이지,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영접치 아니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림(11절)

    이와 같은 행동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거룩한 땅)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 동안 이방 땅에서 얻었던 더러운 먼지들을 떨어버리기 위해 신발을 벗어 터는 행동을 상기하여 하는 행동이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이 거절된 곳이 바로 이방 지역(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곳)임을 암시하며 이들에게 증거(경고)의 표식으로 주어졌다. 또한 이 언급("영접치 아니할 때")은 복음 전파의 과정에는 따뜻한 영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절(배척)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이미 우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보았다.

    (2) 제자들의 복음전파(12-13절)

    예수의 명하심을 따라서 제자들은 나가 주어진 사역을 하였다("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그들이 회개를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사역은 예수님의 권세와 선교의 모범을 따른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의 연장(확장)으로 이해된다. 특별히 회개의 전파는 하나님 나라의 전파의 핵심 된 요소이다(막 1:14-15).

    (3) 제자들의 전도보고와 쉼의 명령(30-31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복음전파로부터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들과 가르친 것들을 예수께 자세히 보고하였고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잠깐 쉴 것'을 명하셨다. 마가의 이 기사에서 특이한 점은 전도의 결과(성공과 실패)에 대한 언급이나 이들의 전도 보고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없다는 점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우리 같으면 바로 상도 주고 핀잔도 줄텐데 예수님은 열심히 전도한 그들의 보고를 받은 후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은 일(work)과 함께 언제나 쉼(rest)을 또한 잊지 않으셨다.

    전도결과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 없이 쉼을 명하시는 예수님.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실천적인 교훈은 '지금은 심판(판단)의 때가 아니다' 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열심히 전도에 순종할 뿐이다. 상과 심판은 마지막 날에 주어진다. 그 날까지 모든 심판은 미루어져 있다. 자세히 행한 일들을 보고한 제자들에게 "와서 잠깐 쉬어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과 심판을 일삼는 우리들에게 던진 훌륭한 경종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성과 주의에 젖어있는 오늘의 한국사회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없는 격려가 된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급한 판단과 심판의 태도를 버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복음전파의 일)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4) 세례 요한의 수난 기사(막 6:14-29)

    마가는 파송 받은 열 두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수행하며(13절) 다시 돌아올 때까지(30절), 그들이 선교하는 동안의 빈 공간에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14-29절)를 기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복음전파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기사는 열 두 제자들의 복음전파로 인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것'(14절)을 시발점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세례 요한의 수난에 대한 기사(17-29절)로 이어져 갔다. 이 기사를 통해서 독자는 복음전파의 중심 내용이 선교기간 중에 논란이 되었던 예수의 신분("그가 누구이신가")과 사역('그의 죽음과 부활':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임을 암시할 뿐 아니라 복음 전파의 삶(증인으로서의 삶)이란 '수난의 삶'(막 8:34-38)임을 시사해 준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의 이 기사는 제자들의 선교 여행기사 중에 삽입(회상)되어 우리의 선교가 '무엇'을 전하여야 하며 또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지를 예시해주는 훌륭한 범례가 된다. 즉 예수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며, 수난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주의 길을 따라 가는 자(증인으로서의 삶)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이다(막 8:34).

    이것은 세례 요한의 수난 기사가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헬라어에서 '증인'(witness)이란 순교자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수난은 앞으로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의 예시로 제시되어지고 있다(Perrin; Garland; Hare). 이미 필자가 여러 곳에서 언급한 대로 세례 요한 -> 예수 -> 제자들의 삶의 수난의 운명은 구속 역사의 지평에 나란히 서있다(막 1:14; 막 9:31/10:33-34; 13:9).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6:14-29)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헤롯왕; 헤로디아와 그 딸; 세례 요한)은 이 기사를 읽는/듣는 독자들에게 다양한 신앙적 독서 경험을 갖도록 해 준다. 여기에 막 4 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각 각의 인물을 평가해 주는 훌륭한 지침서가 된다(Tolbert).

    ● 헤롯왕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네 가지 밭 중에 헤롯왕은 '가시 떨기의 밭'("말씀은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에 해당된다. 헤롯왕은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달게 들었지만'(20절) 어려움이 왔을 때 그는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과 명성("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세상의 염려 혹은 이생의 자랑])에 급급하여 "심히 근심하나"(26절) 결국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의로운 요한을 살해하도록 명한다. 가시떨기의 밭처럼 헤롯도 말씀을 [잠시] 달게 들었다(20절):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그러나 세상적인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 그의 삶의 현장에 찾아왔을 때 그것을 말씀과 기도로 극복하지 못하고 결실치 못한 '가시 떨기의 밭'과 같은 자가 되었다.

    특히 여기 언급된 "심히 근심하나"(περιλυποs)의 헬라어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오직 막 14:34(겟세마네의 기사)에만 다시 나오는 단어(신약에서는 그 외 눅 18:23-24에 부자 관원이 물질로 고민할 때 언급됨)로 이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이들 두 사람(헤롯과 예수)의 모습을 비교함으로써 놀라운 신앙적 교훈을 받을 수 있다. 이 단어가 언급된 두 기사에서 헤롯왕과 예수님(참된 유대인의 왕 메시아)은 둘 다 모두 시험으로 인해 "심히 근심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한 사람(참된 왕 예수)은 그것을 기도로 극복하여 진리를 따르기 위해 수난의 대가를 지불하였다면, 또 다른 한 사람(분봉왕 헤롯)은 자신의 자랑과 명성을 위해 진리(의)를 팔고 불법의 길로 가는 것을 본다. 이점에 있어 헤롯왕은 '가시떨기의 밭'임이 명백하다.

    ● 세례 요한

    여기에 비해 세례 요한은 '옥토'와 같은 밭이다. 그는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불의(불법적인 이혼과 권력유지를 위한 족내혼)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18절: "이는 요한이 헤롯[헤롯 안티파스]에게 [반복하여]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8절의 마가의 지적은 하나님과 복음(진리와 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수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말하는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받는'(막 4:20) 옥토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의(義)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은 자신의 머리가 권력자들의 상(床)에 오르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27-28절). 세례 요한의 이러한 운명은 패역한 세대에서 주님의 길을 따르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어떠한 교훈이 되는가? 패역한 세대의 비참한 희생물(?)로 끝난 그의 죽음은 행동하는 양심의 무능한 종결인가? 아니면 그의 순교는 복음의 영광스러운 승리인가? 여러분의 견해는 어떠한가?

    복음을 위해, 의를 위해, 주님을 위해 홀로 서야 할 시련의 시간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그리고 기타 욕심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불의와 타협하여 주저 앉는가? 아니면 의연하게 일어서서 수난을 맞이할 각오를 하며 진리 편에 서는가? 불의를 보고 그것에 반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지 결코 중립이 아니다(cf. 막 9:40: "반대하지 않는 자는…위하는 자니라").

    이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한 때 말씀을 달게 듣고 때론 심히 근심하나 불의를 보고 행동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행동하지 않는 비겁한 양심'이라고 부른다.

    복음(진리)으로 인하여 시련과 수난의 차가운 겨울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헤롯왕처럼 어느 정도 "심히 근심하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속임)과 기타 욕심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의 심지)이 무너져 주님(복음/진리)을 부인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겟세마네의 자기 부인(self-denial)의 기도의 씨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승리하는가? 우리가 앞으로 살펴 볼 베드로는 주님(복음)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수난을 부끄러워하였다(부인/저주).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히 이 차가운 수난의 겨울을 맞는다("내가 그니라"). 주님은 진리를 위해, 아니 우리의 구속을 위해 수난의 길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걸어가셨다.

    우리는 헤롯처럼 궁중의 세속적 부귀와 쾌락의 잔치와 춤 속에 빠져 휘청되고 있는가? 아니면 세례 요한처럼 광야의 사람으로 그 백성과 더불어 살면서 진리(의)를 위해 핍박을 당하는 감옥과 죽음의 길을 택하겠는가? 수난의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가 목에 걸고 다닌 장식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 그 자체이다.

    ●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살로메)

    헤로디아와 그의 딸(살로메)의 행동은 최근 여성학자들에 의해 많은 해석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주장이 따르면 이 여인의 행동(선정적 춤과 살해)은 남성들의 잘못된 성(sextuality)에 의한 가련한 희생자로 취급되거나 또는 그러한 권력구조에서도 성(性)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쟁취한 위대한 투쟁자로 해석되었다(Anderson 1992:118ff; Glancy 1994).

    그들이 가진 저항의 눈으로 볼 때 여성들의 이러한 행동이 그와 같이 이해될지 모르지만 성경본문은 헤로디아가 자신의 불의를 지속적으로 정죄하는 세례 요한에 대한 복수 때문에 그를 살해하였음을 명백히 언급한다(19절: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 드디어 그녀는 그 기회를 포착하여 자신의 딸을 시켜 요한의 머리를 헤롯왕에게 요구하였고 마침내 요한은 참수된다(21-27절).

    성경본문에 묘사된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하거나 그것을 고소하는 것에 대한 복수와 시기로 진행된 사악한 행동임이 분명하다(Van Iersel 1998:221). 마치 구약에서 의로운 선지자 엘리야를 핍박하였던 이세벨의 모습처럼 그녀의 행동은 간교하고 악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성경은 결코 여성을 사악한 구조적 희생물(무죄한 사람)로만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악의 원흉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자신의 죄악이 지적 받을 때 회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저항하거나 복수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다. 특별히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을 때 이러한 모습은 추하리 만큼 병적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주 보아왔다. 이문열씨의 소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은 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영웅을 추앙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 단락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는 무엇을 전하여야 하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배웠다.

    무엇보다도 복음전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케리그마를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여야 하고, 또한 복음 전파자는 단순한 삶(simple lifestyle)을 통하여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파의 과정에는 반드시 수난의 길이 수반됨을 명심하여야 한다.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그리고 기타 욕심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불의와 타협하며 세속적 궁중(宮中)에서 주저앉아 그들의 상(床)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노는가? 아니면 의연하게 일어서서 수난을 맞이할 각오를 하며 진리 편에 서서 광야의 길을 가는가?

    열 두 제자의 전도 파송 기간 동안에 기술된 세례 요한의 수난기사는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마태복음의 세례 요한에 대한 다음 구절들은 오늘의 본문과 함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7-15).

    <참고문헌>

    Anderson, J C 1992. Feminist Criticism: The Dancing Daughter, in Anderson, J C & Moore, S D. Mark and Method: New Approaches in Biblical Studies, 103-134. Minneapolis: Fortress.

    Garland, D E 1996. Mar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

    Glancy, J A 1994. Unveiling Masculinity: The Construction of Gender in Mark 6:17-29. Biblical Interpretation 2:34-50.

    Gundary, R H 1993. Mark: A Commentary on His Apology for the Cross. Grand Rapids: Eerdman.

    Shepherd, T 1993. Markan Sandwich Stories: Narration, Definition, and Function. Berrien Springs: Andrews University Press.

    Van Iersel, B M F 1998. Mark: A Reader-Response Commentary. Sheffield: JSOT Press.

  • 2002-11-16 01:3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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