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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글모음 게시판입니다.

  모양상상놀이,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세계
  이영식
  

신학생 시절 한강변에 자리 잡은 절두산 천주교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를 인상 깊게 둘러보고 기념품 파는 곳에 들렀는데 여러 가지 모양의 십자가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십자가, 가로로 한 획 긋고 세로로 한 획을 더 그어 만드는 얼마나 단순 모양인가! 하지만 거기 전시된 수 백 종류의 기념품은 제 각기 다른 재질, 다른 모양, 다른 얼굴, 다른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인간이란 이 얼마나 창의적인가! 나는 절두산 성지에서 만난 다양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창의성이 뿌리 내리고 있음을 절감했다. 창의성(創意性)이란 새로운 생각이나 개념을 찾아내거나 기존에 있던 생각이나 개념들을 새롭게 조합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영국의 저명한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에는 창의성이 살아 숨 쉰다. 그는 1946년 영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림을 배우고 순수미술을 꿈꾸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배고프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응용미술학과에 진학하여 그래픽 디자인(광고)을 공부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3년 동안 맨체스터 왕립 병원에서 의학 전문 화가로 취직하여 수술 장면을 빠른 시간 내에 정교하게 표현하는 기술을 연마했다. 응용미술을 전공하면서도 또 피로 얼룩진 수술 장면을 사실적으로 실사 하면서도 앤서니 브라운이 결코 끈을 놓치지 않은 것이 있는데 사물을 살짝 비틀어 그리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가 취미로 그린 옆서가 그림책 편집자의 눈에 띄어 그림책 작가로 데뷔한다. 줄리아라는 그림책 편집장으로부터 그림책은 “글과 그림 사이에 여백이 있어야 한다.”라는 매우 중요한 원칙을 배운다. 『고릴라』를 비롯하여 『동물원Zoo』, 『몽상가 윌리Willy the Dreamer』, 『마법사 윌리Willy the Wizard』, 『윌리와 휴 Willy and Hugh』, 『돼지 책 Piggybook』, 『고릴라』와 『미술관에 간 윌리』등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들이 국내에도 번역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술이란 사물을 살짝 비틀기”라고 앤서니 브라운은 정의하면서 자신의 그림책에 “모양 상상놀이”(paying shape the game)라는 형태로 구현했다고 한다(앤서니 브라운 나의 상상미술관/웅진주니어). 그는 이 놀이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하는데 두 가지 색깔의 필기도구를 준비한 다음 한 사람이 추상적 모양의 도형을 그려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활용하여 의미 있는 그림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원래의 이미지를 인용하면서도 살짝 비틀어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모양상상놀이는 그의 모든 작품에 스며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미는 『돼지 책』,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 Voices in the Park』, 『미술관에 간 윌리』라고 생각한다.

『돼지 책』은 필자가 마중물 역할을 하는 독서매체로 그림책에 주목하고 활용하기 시작했을 때 일이다. 대개 어른들은 문자 중독자들이어서 수천억 원짜리 피카소의 명작 그림을 관람하면서도 캡션에 적힌 글자만 보고 휙 지나간다. 그러기에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 책』에 얼마나 많은 돼지 그림이 숨겨져 있는지 다름 아닌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이 발견하기 시작해서 어른들도 헤아려보게 되었다(여러분도 한 번 헤아려 보시기를 바란다). 두 부부와 아들 둘, 네 식구가 사는 가정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은 남편 이름이 "피곳"(Pig+god)이다. 아들들은 사이먼과 패트릭인데 부인은 아예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다. 남자들은 중요한 학교와 중요한 회사에서 돌아오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피곳 부인만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이런 날이 계속되면서 그림책 속의 모든 사물들이 점차 돼지로 변해 가는데 시계와 접시, 컵, 벽지 문양, 벽난로 문양, 고양이, 벽에 걸린 그림, 심지어 세 남자까지 점차 돼지로 변해간다. 아하, 이렇게 재미 있는 그림책을 어른들은 글자만 보기에 바쁜데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잘 띄었던 것이다.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는 작품의 원제는 『Voices in the Park』이다. “이야기”가 강조된 한국어 제목 번역은 “목소리”(Voives)가 강조된 원작의 제목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 두 부녀와 두 모자, 네 사람이 같은 시간 같은 공원에 산책을 하고 왔다는 매우 단순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따라 같은 공원이 어떻게 다르게 묘사되고 있는지 관찰해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필자는 이 작품을 수많은 강의에서 보여 주며 함께 관찰했는데 끝없이 숨겨진 그림이 발견된다.

나는 창의성이야말로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같은 동물도 자세히 뜯어보면 똑 같은 개체는 없고 같은 꽃이라도 똑 같은 것은 없다. 사람의 손금도 그러하며 홍채나 성문(聲紋)역시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은 종(種)이라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지만 그 안에서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예술이란 사물을 살짝 비틀기라는 앤서니 브라운의 예술관은 이런 점에서 깊이 공감이 간다. 앤서니 브라운의 작품을 읽으면서, 또 그가 제안한 모양상상놀이를 가족들과 함께 해 보면서 내 안에 잠재된 창의성을 끌어내면 좋을 것이다.

2020년 12월 3일, 사람을 세우는 사람 이영식
2020-12-03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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