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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글모음 게시판입니다.

  내 인생의 스승, 전석주 목사님(2011년 스승의 주일에)
  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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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이라는 영화를 감명깊게 본 적이 있다. 세상이 온통 어둠뿐인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중 장애를 지닌 소녀의 이야기로 인도의 산제이 릴라 반살리 감독의 2009년도 작품이다. 인도판 헬렌 켈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미셸은 세상이 온통 어둠뿐인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중의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듣지 못하니 말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줄도 배울 수 없어서 그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것이 일상사인 그녀가 ‘사하이’라는 선생님을 만나면서 운명이 달라진다.그렇게 되기까지 사하이 선생님은 사회적 편견은 물론 심지어 부모들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해 주인공의 세상에 대한 도전이 끝없이 펼쳐진다. 한 장애 학생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어주고 그것을 꽃피워 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스승의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드러내준 명작이다.

나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복 가운데 만남의 복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부모를 잘 만나고 배우자를 잘 만나는 복 말이다. 그 중에서도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부모를 잘 만나는 복은 받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스승 한 분을 잘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스승은 단연코 전석주 목사님이시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열두 살 아래 동생을 돌보면서 장래 희망도 뚜렷이 무엇이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상실했었다. 그저 부모님을 도와서 평범한 농사꾼이나 되겠다는 정도로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다니던 교회마저 발걸음을 끊게 되었다. 나의 모교회인 지도중앙 교회는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고 우리 집에서 교회까지는 십리가 넘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1975년 경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특별한 결심을 하셨다. 읍내에서 산고개 하나 너머에 있는 넘앙골이라는 곳에 김씨문중 산지기로 거주지를 옮긴 것이다. 아버지를 끝없는 머슴살이에서 구해내고 비록 소작농이지만 자신의 땅을 일구어 먹고살 터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산지기란 문중에 소속된 산과 무덤을 돌보는 대신 거기에 소속된 전답을 부쳐 먹을 수 있는 일종의 관리직을 말한다. 당시 우리 집은 고사리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이삿짐을 소달구지에 싣고 신작로에다 부린 다음 이고지고 다시 집까지 옮겼다. 소달구지도 들어 올 수 없을 만큼 외딴 산중에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단지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억척같은 생명력으로 묵은 전답을 갈아엎고 씨를 뿌렸다. 이런 연유로 지도중앙교회는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십자가 탑이 보였다. 당시 전석주 목사님은 50대 후반으로 대학을 졸업한 다음 교사로 교육에 종사하다가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신 분이다. 늦게 시작한 목회인지라 가족들이 모두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홀로 시골에 내려와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신앙뿐만 아니라 지성에 있어서도 앞섰던 목사님은 만나는 청년마다 공부할 것을 권면하는 한편 야학을 열어 배움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런 소문은 금방 마을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 날은 어머니께서 소식을 듣고 와서, ‘영식아, 너도 교회 가봐라. 새로 오신 목사님이 공부를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직 나는 공부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터라 어머니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 모 집사님께서 교회 확장 공사에 일손이 필요한데 품을 팔러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 왔다. 돈을 벌로 오라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돈버는 재미로 교회에 갔지만 전석주 목사님을 만나면서 그분의 인격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발길을 끊었던 교회를 다시 다니게 되었다.

전석주 목사님은 청년들을 끊임없이 없이 독려하여 공부하도록 했다. 물론 나에게도 외예가 없었다. 나에게 지금이라도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며 조지 워싱턴 카버를 비롯하여 역경을 딛고 공부로 성공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인생의 방향과 비전을 완전히 상실했던 나는 그분의 격려로 마음 속 깊이 감춰 두었던 성장의 동기가 꿈틀거리며 깨어나고 있었다. 그때가 열일곱의 나이이니 이미 동기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있던 터였다. 중학교 과정을 독학하기로 결심이 서자 곧 실천에 옮겼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1970년대 지도읍에 검정고시 학원 같은 것이 있을 까닭이 없다. 방법은 딱 한 가지, 중학교 교과서와 참고서를 구입하여 문자 그대로 독학(獨學)하는 것이다. 나는 1977년 1월 중학교 통신 강의록을 구입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중학교 과정을 어떻게 독학해야하는지 알지 못했던 나는 무조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베끼고 암기하는 좀 무식한 방법으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힘든 과목은 수학과 영어였다. 두 과목은 전석주 목사님에게 찾아가 묻곤 했는데 언제든지 환영하며 기꺼이 가르침을 주셨다. 이렇게 1년 7개월을 준비하여 1978년 8월 4, 5일 양일간 목포고등학교에 가서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여덟 과목 전 과목에 응시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발표 일을 기다렸는데 40점미만인 과락이 없고 평균 60점이 넘으면 고등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해 8월 29일, 스무 나흘을 기다린 끝에 전화를 걸었다. 합격 이었다! 그것은 여느 학생들이 중하교 졸업장을 받아든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내 인생의 방향이 송두리째 바뀌는 전환점이었다. 당시의 기쁨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귀뚜라미를 수화자로 적고 있다.

“뚜르르르 우는 귀뚜라미들아 너희들도 기뻐해 주느냐. 기쁜 소식을! 가슴 조이던 24일이 지나고 전화를 걸었지. 가슴이 마구 뛰었지. 세 번이나 걸었지. 아 그때 정말 뭐라고 표현할까. 난 꼭 떨어진 줄 알고 단념 상태에 있었지. 하지만 ‘61번 이영식 합격했어.’라는 수화기의 음성, 너도 한 번 그때 내 기쁨을 상상해 보렴. 이게 정말일까 확인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자랑하고 싶었지. 전화를 빌려 준 천환씨를 찾아 갔지만 가게에 없었어. 이번에는 나에게 책을 많이 외상 해주고 편리를 보아준 서점을 갔어. 하지만 거기도 주인이 없었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교회에 들렀어. 기뻐서 감사 기도를 드렸어‧‧‧‧‧‧.”

나는 고등학교입학 자격검정고시 합격을 통해서 ‘나도 공부하면 할 수 있다.’라는 확고한 자신감을 얻고 있었다. 그와 같은 자존감은 순전히 전석주 목사님께서 나를 격려하고 틈틈이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시고 직접 지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열정의 열매였다. 나는 그 여세를 몰아서 고등학교 과정에도 도전했다. 하지만 워낙 중학교 기초실력이 빈약한 상태에서 차원이 달라진 고등학교 과정을 막무가내로 독학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고심 끝에 한 달에 두 번 학교에 출석하고 모든 강의를 라디오 방송으로 수강하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1984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던 것이다.

전석주 목사님이 미친 영향력은 단지 학업과 관련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방향을 잃고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던 청년은 그의 말과 행동, 사상, 신앙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있었다. 가족이 그분 곁에 없었던 것이 그분에게는 크게 불편한 일이었겠지만 배움에 굶주린 우리 청년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목사님은 청년들과 대화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사실 그분의 설교는 그다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어려운 용어를 많이 썼던 것으로 된다. 그보다는 삶으로, 대화를 통해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화의 내용은 주로 신앙과 신학, 철학, 문화와 같은 내용들이었다. 독서량이 풍부했던 목사님은 여러 신학자들의 중심 사상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시곤 했다. 그 가운데서도 나의 뇌리에 깊이 박힌 사상은 인간의 변화와 성화에 대한 과정과 관련된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을 향해 간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면서 직선과 원을 그려서 설명해 주셨다. 누군가의 이론이라고 일본신학자의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명확하지 않다. 인간이 지향하는 완전의 세계는 원과 같이 둥근 반면 유한한 3차원의 세계를 살고 있는 인간은 늘 직선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번의 방향전환이나 결심으로 온전한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기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평생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나의 인생 플롯 가운데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평생 학습자로 살겠다.’라는 것이다. 평생 학습자 플롯은 이렇게 싹이 트고 내가 처한 가난이라는 환경을 자양분으로 풍성해져간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시골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하는 것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밥 짓기를 비롯하여 소 꼴 먹이기, 꼴 베기, 나무 해 오기, 동생 돌보기 등 집안일과 농사일 거드는 것을 더욱 장려했다. 나 역시 방과 후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나가 친구들과 실컷 놀다가 땅거미가 내려서야 집에 들어갔다. 그럴 때면 부모님께 야단맞기 일쑤다. 거기다가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시골 청년에게 농사일 대신 그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다. 말하자면 공부하는 것은 노는 것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평생 학습자로 플롯은 확고하게 다진 것은 학부 1학년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당시 신약성경을 가르쳤던 문상희 교수께서 강의 중 연세대학교 전 총장이신 백낙준 박사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박사님은 은퇴 후에도 중앙도서관 맨 꼭대기 층에 자기 방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찾아뵈면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암기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백 박사님은 1985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평생 학습자가 되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평생 학습자 플롯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나를 지속적인 독서의 세계로 이끌었다. 학창시절에는 짜여진 교과과정을 따라가느라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지 못했었다. 졸업한 후에야 내가 관심 있는 분야를 깊이 있게 읽는 주제별 독서에 몰두 했다. 그리고 더 공부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나는 석사나 박사, 어떤 정규 과정을 학습의 끝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평생 학습의 한과정이요 학문하는 방법론을 몸으로 체득하는 기회라고 본다.

지금 상담을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전석주 목사님은 대인관계 능력과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탁월한 분이셨다.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고 잘 표현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생산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도록 돕는 기술로 ‘감정코치’가 있다. 또한 자신의 강렬한 부정적 감정을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기술로 ‘나 전달법’(I-message)이 있다. 목사님은 이런 대화기법을 이미 우리 청년들에게 실천하고 계셨다. 한 번은 교회 청년들이 예배당을 사용한 뒤, 문은 열어두고 선풍기는 그대로 돌아가고 있으며 전등불이 환히 켜져 있는 것을 목사님이 보셨다. 그러자 “나는 너희들이 예배당을 사용한 후 문을 열어두고, 선풍기를 끄지 않고 전등불도 켜놓은 채 그대로 두어서 몹시 화가 난다. 다음부터는 뒷정리를 잘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천방지축인 청년들의 인격이나 능력 비난하는 대신 정확하게 나 전달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화난 감정을 전달하셨던 것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교회에서 특별강사를 모시고 사경회(성경공부) 집회를 하고 있었다. 철부지였던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교회 옆 나무 밑에 앉아서 피리를 구슬프게 불어댔다. 내 피리 소리가 집회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 나를 만나자 목사님은 ‘네가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피리를 큰 소리로 부니 몹시 방해가 되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적어도 내 기억에 그때 그 시절에 우리 동네에는 이런 대화법을 쓰는 분은 없었다. 입만 열었다하면 욕이 절반인 그런 문화에 젖어 있어서 아이들도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당시는 그분의 대화방법이 얼마나 성숙한 것인지 나에게 평가할 능력이 없었다. 상담학을 공부하고 나이가 지긋해진 다음에야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석주 목사님은 몇 년간 우리 교회를 섬기시다 다른 농촌교회로 떠나셨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거의 독학으로 마치고 나는 1984년 봄 수학을 위해서 상경했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으나 부모님의 근심은 더욱 커졌다. 당시 50만원이던 한 학기 등록금은 매우 큰 금액으로 우리 집안 형편에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등록금 마감일은 눈앞에 다가오는데 돈을 마련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작심하고 2월 아직 바람이 매서운데 혼자 예배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등록 마감일이 이틀 남은 날 밤이었다. 초소한도 내일까지는 마련되어야 하루 종일 서울까지 가서 기간 안에 등록을 마칠 수 있는 것이다. 추워서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자 나는 서서 예배당을 뱅뱅 돌아다니며 같은 기도를 반복했다. “주님 저에게 등록금을 주십시오. 그러면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50만원 거금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밤을 꼬박 세운다음 집에 돌아왔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들의 등록금 때문에 한숨만 짓고 있던 어머니께서 읍내에 나갔는데 쌀집을 하는 동네 아저씨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교우들과 먼 친척 되는 형님께서 얼마간 돈을 빌려주시고 해서 마감 시간 안에 등록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84년 2월 하순 고향을 떠나 상경했는데 현실은 등록금만 마련하는 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먹고 잘 곳이 필요했는데 하숙할 처지가 못 되었고 그렇다고 월세 보증금도 마련한 형편이 못되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다는 외삼촌을 찾아가 당분간 지내보기로 계획을 세우고 어머니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서 놀라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이미 타지로 떠나신 전석주 목사님께서 달려와 계셨던 것이다. 전목사님은 우리 모자와 함께 서울까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서울까지 가는 내내 목사님은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어머니를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영식이는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니 두고 보십시오. 꼭 국제적인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버스 안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던 장면을 곱씹고 있었다. “그렇다. 이 길이 아브라함처럼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시는 길이니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의연히 이겨내고야 말리라.”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지리를 잘 모르는 우리 모자를 안내해서 목사님이 외삼촌을 찾는 데 도와주셨다. 갑자기 들이닥친 조카를 보고 외숙모께서 얼마나 놀랐을지 당시는 철이 없어서 짐작도 못했다. 그분들도 그리 넉넉한 살림이 아니어서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외삼촌 내외를 만난 자리에서 목사님은 침을 튀겨가며 내가 얼마나 큰 대성할 인물인지를 열심히 설명하시고 설득하셨다. 그렇게 하여 나는 단칸방에서 사시는 외삼촌 외숙모, 그리고 두 명의 사촌 동생들 틈에 끼어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두어 달 정도 머물고 학교 주변 하숙집으로 곧 옮겼지만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분들이다. 나는 ‘국제적인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석주 목사님의 말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분의 기탄없는 격려는 훗날 나에게 영어를 깊이 공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국제적인 인물이 되려면 영어 하나는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워낙 중‧고등학교 과정을 독학으로 마친 나는 영어정복이 큰 과제였다. 학부 시절에는 아르바이트 하랴 공부하랴 시간이 없어서 영어 공부에 몰입하지 못했으나 신학대학원 재수를 하면서는 아예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강남의 민병철 학원, 노량진의 입시 학원을 전전하며 영어를 배웠다. 신학대학원 3년 재학시절에도 새벽 반 수강증을 끊어서 영어를 별도로 공부했다. 그리고 1995년 필리핀에서 1년간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그 때 나의 영어 실력은 몇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처럼 내가 영어공부의 끈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은 전석주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국제적 인물’플롯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플롯은 어느 정도 성취를 보고 있다.

2011년 4월 어느 날 나는 전석주 목사님의 부음을 들었다. 향년 96세로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사위 되시는 목사님께서 전해주셨다. 생전에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문상이라도 할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유족들과 목사님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마음이 따뜻해지고 스승의 가르침대로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전석주 목사님은 사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으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11-05-14 19: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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