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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의 독서지도 연구게시판입니다.

  [강좌]수필쓰기에 관하여(수필의 문학적 위상)
  김형진 [ E-mail ]
  

김형진 님의 수필쓰기에 관한 강좌입니다. 독서지도의 한 영역으로 글쓰기 지도에 소중한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퍼 와서 여기에 정리해 두고자 합니다.이 글의 출처는 문학의 즐거움(http://www.poet.or.kr) 사이트임을 밝힙니다. - 홈지기 이영식-
수필작법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보시려면 한국수필작가회 홈페이지(http://www.essay.or.kr)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I.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이다


1. 들어가는 말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필이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시, 소설, 희곡, 평론처럼 한 문장으로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나 희곡이나 평론 이외의 잡다한 산문들이 '수필'이라는 명찰을 달고 세상을 활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수필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일면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역대 수필가들의 안이한 대처에도 있지 않을까 한다.

문학의 어떤 장르도 처음부터 일정한 양식을 갖추고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고대의 시는 주문(呪文)에 지나지 않았고, 희곡 또한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의 대화에서 비롯되었고, 소설은 허무맹랑한 심심풀이 담화에서 시작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의 수필이 사상가의 여록(餘錄)에서 출발했고, 동양 수필이 선비들의 흥미 있는 신변잡기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유독 수필만이 아직도 흥미 위주의 신변잡기나, 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체험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시, 소설, 희곡, 평론이 각각 자기 부문의 변화와 성장을 계속해왔는데도, 유독 수필에서만 문학사적 흐름이 정체(停滯)된 상태에 있다. 수필에는 고전주의도, 낭만주의도, 사실주의도, 예술지상주의도, 모더니즘도 없다. 아직도, 문장이 유려하고 반듯한 생각을 조리 있게 써 놓으면 수필, 그것도 우수한 수필 행세를 하게 되었다. 이제 수필도 문학사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수필도 장르적 특색을 정립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이다. 그것도, 장르 사이의 벽이 낮아지고 있는 현대문학의 특성을 고려할 때, 어느 문학 장르보다 미래가 밝은 문학 장르이다. 나아가 의식의 저변을 천착(穿鑿)하여 진실을 표출하려는 현대 문학의 시도는 수필에서 완성될 가능성이 짙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정립하고, 수필의 문학적 기능을 극대화하여 현대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특성을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다..

2. 수필에 대한 잘못된 인식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글은 실용적인 글, 일반적인 글, 학술적인 글, 문학적인 글로 나눌 수 있겠다. 실용적인 글은 국가적, 사회적, 가정적, 개인적인 문제들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해결하는 데 쓰이는 모든 글이다. 일반적인 글은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사실을 정리하여 쓴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나 수기, 전기 등이며, 학술적인 글은 특정 분야의 학자가 자기 연구의 결과를 논리 정연하게 쓴 학술논문 등이며, 문학적인 글은 언어를 수단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이다. 때로는 구분이 모호한 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그 글을 쓴 목적이나 용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잘 쓴 전기도 소설이 될 수는 없으며, 수기나 신문 사설 또한 수필이 될 수는 없다.

흔히 '문학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 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유개념(類槪念)은 '예술'이며, 종개념(種槪念)은 '문학'이고, 종차(種差)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이다. 그러니까 문학은 미술, 음악, 무용으로 대별되는 예술의 한 갈래인데, 그 표현 수단이 언어라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가려는 줄기찬 노력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 펼쳐내는 곧 인위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이고 문학이 예술의 한 분야라면 수필 역시 인위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새소리가 음악이 될 수 없으며, 불타오르는 가을 산을 미술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술품이란 얻어진 소재를 가지고 작가가 자기의 주관을 담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있는 그대로의 것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 이는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요, 문학이 예술의 한 분야라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데서온 잘못된 인식이다. 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지 않고는 수필의 위상은 영원히 미궁에 갇혀 있을 것이요, 당연히 수필의 미래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선 일반화된 수필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려 한다.

(1)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가?

수필(隨筆)이란 명칭은 중국 남송대(南宋代)에 홍매(洪邁)가 쓴 '용제수필(容齊隨筆)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수필이란 명칭을 쓰게 된 연유를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뜻한 바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가려 챙길 것도 없이 바로바로 기록하여 놓은 것이기에 수필이라 일컫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풀이하는 것은 아직도 약 800년 전 홍매에 머물러 있다 할 것이다. 그러면 소설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소설(小說)아란 명칭은 중국 후한대(後漢代)에 반고(班固)가 쓴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의 '소설가자류 개출어패관 가담항설자 도청도설지소조야(小說家者流 蓋出於稗官 街談巷說者 道廳塗說之所造也)'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이는 대강, 소설이라는 것은 패관들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지은 것이라, 풀이된다. 그런데도 현대에 와서 소설을 '가담항설 도청도설'로 풀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事實)를 쓰는 글'이라는 풀이가 될 수 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수필이 문학예술의 한 장르임을 망각한데서 온 잘못된 인식이다.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할 것은 예술의 세계에는 사실(寫實)이 있을 뿐 사실(事實)은 없다. 문학에 있어서의 사실(寫實)은 실제처럼 베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실제처럼 느끼고 생각하도록 쓰는 것을 의미한다.

(2) 수필은 형식이 없는 글인가?

수필은 '무형식이 그 형식이다.'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을 대개 '형식이 없다.' 또는 '형식이 자유롭다.'로 풀이한다. 그러나 '없다'든 '자유롭다'든 이는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형식이 그 형식'이란 말장난일 뿐 말이 되질 않는다. '없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세상 만물 중에 형식이 없이 알맹이만 있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냇가에 핀 이름 없는 풀꽃 한 송이도 뿌리에서 나온 속잎이 자라 잎의 형태를 갖추고 줄기를 뽑아 올린 뒤에야 꽃봉오리를 맺는다. 뿌리가 없고 잎과 줄기가 없는 풀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형식이 없으면 내용도 없다.

다음에는 '형식이 자유롭다.'라는 풀이이다. 이는 억지 해석이다. '무형식'이란 형식이 없음을 뜻한다. 형식이 없음이 그 형식이이란 말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형식이 자유롭다.'로 풀이되는지 알 수 없지만, 십분 이해의 폭을 넓힌다해도 이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시도, 소설도, 희곡도, 평론도 수용할 수 있다는 식의 이해가 정말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서사시는 무어고, 소설 속에 나오는 시는 무엇이며, 극시는 또 무언가. 소설 속에 나오는 편집자적 논평은 어떻게 보아야하며, 언뜻 이론적이고 비판적인 글로만 보기 쉬운 평론이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건 또 어찌 보아야 하는가. 서사시를 우리는 소설이라 하지 않고, 소설 속에 시가 들어 있다 해서 소설이 시를 수용한다 하지 않으며, 극시를 희곡이라 하지 않고, 소설 속에 편집자적 논평이 있다 해서 소설이 평론이나 수필을 수용했다 하진 않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필은 일기도, 서간문도, 기행문도, 감상문도, 전기나 수기도 수용한다고까지 한다. 이 또한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흐려 놓는 중대한 오해이다. 일기는 일기요, 서간문은 서간문이요, 기행문은 기행문이다. 감상문도 전기나 수기도 마찬가지이다. 일기나 서간문이나 기행문의 형식을 빈 시나 소설은 얼마든지 있으며, 전기나 수기 형식을 빈 소설도 희곡도 있다. 그런데도 시, 소설, 희곡은 '형식이 자유롭다.' 하지 않는다. 수필은 수필이어야 한다.

(3) 수필은 고백의 문학의 문학인가?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백(告白)이란 '비밀이나 생각을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라 풀이되어 있다. 이것이 수필을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쓰는 글.'이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사실대로(있는 그대로)'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예술에는 사실(寫實)이 있을 뿐 사실(事實)은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현실 속의 사실(事實)도 작품 속에 들어오면 이미 사실(事實)은 아니다. 사실(事實)이란 재료를 가지고 작가가 창조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것은 예술적(문학적) 사실(寫實)로 변용(變容)한다.

그렇다면 수필을 '고백의 문학'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진실을 표출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동감을 표하며, 나아가 수필이 내면의 진실을 천착해 내는 데 주력하는 현대문학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는 장르라 믿고 있다. 둘째는 화자(話者)가 '나(일인칭 주인공시점)'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고백(일인칭 주인공시점)은 형식상의 문제이지 내용상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내(필자)'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속내를 드러내듯이 쓰는 글이란 말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수필가가 쓴 작품 속의 것들을 사실(事實)로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수필가는 글을 쓸 때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소설 같으면 자기의 신체적 비밀이나, 자기가 직접 행한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대리인을 내세워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할 수 있으나 수필에서는 이게 자꾸 망설여진다. 이것이 수필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필에서 추구하는 진실이 현실 그대로의 사실(事實)이 아니라 문학적 사실성(寫實性)에 기초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4) 수필이 정말 선비의 문학인가?

수필을 '선비의 문학'이라 하는 것은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선비의 문학'이란 말은 옛 선비들의 문집을 염두에 두고 끌어낸 듯싶다. 그러나 옛 선비들의 문집이 다 수필적이진 않다. 오히려 선비들로부터 천대받던, 고려시대에는 패관잡기(稗官雜記)가, 조선시대에는 고문(古文)을 어겼다하여 유학자(儒學者)들로부터 지탄받던 잡기(雜記)가 훨씬 수필에 가깝다. 그러니까 선비가 쓰긴 했으나 선비의 글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글에서 수필은 시작하였다. 이규보의 '파한집(破閑集)'이 그러하고,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가 다 그러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명수필로 인정받는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조침문(弔針文), 동명일기(東溟日記)는 모두 여류의 작품이다. 고전 속의 수필적인 글을 통해서는 수필이 '선비의 문학'이란 말을 수용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잘못된 발상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고백의 문학'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수필은 대리 화자를 내세울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 때문에, 독자들은 수필 속에 나오는 말이나 행동은 수필가 자신의 말이요, 행동이라 단정한다. 그래서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이 수필에 그대로 적용된다고들 한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수필가보다 더 독자를 의식하고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적절한 인간관계의 적나라한 묘사는 물론, 비어나 속어까지도 금기시(禁忌示)하게 되었다. 진실 표출을 염두에 두고 내세운 고백의 문학이 선비의 문학과 야합하면서 위선의 문학으로 둔갑해 버리는 폐단을 낳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는 대목이다.

(5) 수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가져온 부작용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그저 붓 가는 대로 쓰는 산문이 수필이고 보니, 어느 정도의 문장력만 있으면 누구나 쓰는 글이 되어 버렸다. 솔직 담백해야 한다느니, 점잖아야 한다느니, 약간은 웃음을 자아내게 할 수도 있고, 재치가 번득일 수도 있다느니, 하는 부수적인 요건이 있긴 하지만, 이거야 타 문학 장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되는 요건이 아닌가. 오히려 이러한 요건들에 대한 집착은 수필의 정체(正體)를 모호케 하여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수필의 위상(位相)을 흔들어 내리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타 장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숙련된 문장으로 포장한 체험담이나 편상(片想)들을 수필이란 명찰을 붙여 세상에 내어놓아 활보하게 한다든지, 음악, 미술, 연극, 철학, 사회, 정치, 경제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예술과는 거리가 먼 여록(餘錄)들이 버젓이 수필(에세이) 행세를 한다든지,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이 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잘 팔리는 수필 노릇을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수필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선 수필이 독립된 문학예술의 한 부문임을 인식해야하며, 수필에 대해 열정을 갖고 고민을 거듭한 뒤 수필다운 글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타 분야나 타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저 행과 연을 갈라 리듬을 만든 시답지 않은 글을 신문이나 잡지, 또는 단행본으로 발표했을 때 시인들의 반응은 어떠하겠는가. 도저히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수필에서는 그런 일이 용납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유독 수필만이 정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필의 참모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II.수필도 이제 타고난 운명만을 탓하고 있진 말자.


1. 수필은 어디서 왔는가?

수필의 정체를 찾기 위해 우선 수필의 기원에 대해 일별(一瞥)해볼까 한다. 모든 예술이 다 그러하듯, 문학도 원시종합예술(原始綜合藝術)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제천의례(祭天儀禮)에서 주술적인 몸짓과 소리와 말이 한 덩어리를 이루던 것이 차츰 분화(分化)되어 단일예술이 되었고, 그 중의 하나가 문학이다. 신성한 제전(祭典)에서 하늘에 고축(告祝)하던 기도문이 시의 기원이며, 타 부문의 문학은 이 시에서 변화 발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중 원시적 주술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시와 비슷한 장르가 연극의 대본인 희곡이다. 유럽의 연극은 디오니소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에서 출발하여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비극의 꽃을 피웠고,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시작한 팔관회(八關會)가 고려에서는 연등회와 더불어 국가적인 큰 행사로 치러졌다. 우리 연극의 기원도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원시적 주술성을 탈피하고 인간세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서 수필, 소설과 같은 산문이 시작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수필, 소설의 발생은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의 유학(儒學)과 도학(道學)이,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이 인간세계에 눈을 돌림으로써 삶에 대한 문제가 주관심사로 떠오른 데서 이 산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시나 희곡이 절대자에 대한 기원, 운명에 대한 순종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의 문제를 스스로가 해결하려하기보다는 신에 의지하려는 모습을 보인, 철학 이전의 것이라면, 이 산문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성립된 문학 장르이다. 그러니까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정신 위에 세워진 문학 장르라 할 수 있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산문이 시작된 점은 역사의 신비라 할 것이다. 어쨌든 시가 무가(巫歌), 기도문에서 발전한 것과는 달리, 수필, 소설은 철학자나 사상가의 여록(餘錄) 내지 한담(閑談)에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수필이 소설과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소설이 항간에 떠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수집한 데서 시작했다면, 수필은 철학적 사유(思惟)를 사물과 빗대어 표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화자를 기준으로 볼 때, 소설은 글 뒤에 숨어 있는 작가가 대리인을 내세워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면, 수필은 작가가 표면에 나서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많은 부작용으로 작용하는 수필이 타고난 운명인 것이다.

2. 수필만 운명에 순종해야 하는가?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수필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되었으며, 그것도 필자가 글의 표면에 나서 서술하는 형식의 글이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필자가 직접 서술하는 형식을 띤 글은 참으로 많다. 그 중에 학문적인 체계가 뚜렷한 학술적인 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수필로 인정되기 쉽다. 이런 면에서 고대나 근대 학자들이 쓴 철학적 단상, 인물평이나 서평, 서간문, 일기 등은 수필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이런 성격의 글들이다. 그러다 보니 문학적 형상화와 관계없는 잡다한 글들이 수필이라는 명찰을 달고 활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 시작이 수필과 비슷한 소설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자. 화자가 글 뒤에 숨어 이야기해 가는 성격을 띠고 태어난 소설은 화자를 글의 표면에 내세우는 일인칭시점을 개발하여 쓰고 있다. 그러면서 이것이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무의식의 세계(진실)를 표출해 내는데 적격인 기법이라고 자랑한다. 달리 말하면 수필의 영역에 침투하여 그것이 새로 찾아낸 아주 좋은 방법이라 자랑하는 식이다. 그리고 허무맹랑한 뜬소문에서 시작한 소설은 그 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실제보다 더 사실적인(진실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야담(野談)이나 야사(野史), 전설(傳說)이나 전기(傳記) 등과는 엄격히 구분한다. 요즈음엔 소설보다 더 흥미 있는 르포문학이라는 것이 얼굴을 내밀기도 하지만 이걸 소설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수필도 어엿한 하나의 문학장르로서 수필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야 한다. 타고난 운명을 탓하고만 있어서도 안 되며, 운명에 순종하고만 있어서도 안 된다.

III.수필의 참 모습을 찾아



1.짧아서 아름다운 산문

수필은 짤막하고 부드러운 산문이다. 보석으로 친다면 채굴한 그대로의 원석(原石)이 아니라 정교하게 가공한 한 알의 연옥이나 비취요, 꽃으로 친다면 한 아름이나 되는 꽃다발이나 요란하게 장식한 꽃바구니가 아니라, 안개꽃을 조금 곁들인 장미 한 송이쯤 된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큰 사건 앞에서 사람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분강개할 때에도 수필가는 냉철해야 한다. 우선 사건의 핵심을 정확히 찾기 위해서다. '떨어지는 낙엽 한 장으로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는 식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사건의 핵심이 자기 안에서 녹아 완전히 자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현실 속에서 받아들인 사건(소재)의 자기화 과정에 필수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자기의 정서와 사상(철학)이다. 밖에서 들어온 소재가 자기 안에서 녹아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될 때, 자연스러움이 살아난다. 자기화가 덜 된 글은 어색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큰 것에서 그 핵심을 찾아 작으면서도 부드럽게 그려, 읽는 이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사실성(寫實性)이 필요하다. 사실(事實)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면, 사실(寫實)은 현실 속의 사실을 자기 안에서 녹여 내는 자기화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실(事實)보다 더 진실한 것이 사실(寫實)이며, 문학이 추구하는 것은 이런 사실(事實(사실))보다 더 진실한 세계이다.

짧은 글 속에 잔잔한 진실을 담아야 하는 수필은 시에 못지않은 정교함과 소설보다 치밀한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지 형성, 암시적 표현 등의 기법과 묘사, 서사, 유추 등의 서술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난해한 시처럼 모호하거나 소설처럼 구석구석 시시콜콜한 것까지 잡아내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의 한 단면을 평이하여 쉽게 읽을 수 있게 써놓은 듯하지만 그 안에 범상치 않은 생각이나 느낌이 놓아 있는 글이 수필이다..

수필가는 일류 귀금속 가공 기술자이거나, 장미나 국화 한 송이를 채반에 꽂아도 남다른 멋을 연출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치밀한 구조, 정교한 표현으로, 작고 평범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표출해 내야하기 때문이다.

2.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한 글

수필은 너그럽다. 잘 쓴 수필일수록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은 듯 자연스럽다. 그래서 수필에는 '형식이 없다' 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겉만 보고 속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었으면서도 사람이 지은 것 같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예술작품을 신품(神品)이라 한다. 신이 지은 작품은 자연이다. 그러니까 최고의 예술작품은 사람이 꾸몄으나, 신이 지은 것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말이 된다. 곧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이다. 자연스러움은 너그러움으로 통한다.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듯 넉넉함은, 치명적인 결함이나 절망적인 낙오까지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새롭게 할 수 있다. 그것은 거듭남이다.

그런데 이 너그러움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무절제한 너그러움에는 힘이 없다. 자포자기인 셈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시키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엄격함이다. 곧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은 수필가의 인격과 맞먹는다. 형식이 엄격하면 모양새는 쉽게 갖출 수 있다. 그러나 겉모양을 가꾸는 일에 열심인 사람일수록 내면이 허술한 경우가 있듯, 예술작품에서도 형식에만 치중하다 내면을 놓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내면의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고심 끝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형식이야말로 천의무봉일 것이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수필의 형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수필에는, 시, 소설, 희곡, 평론과 같은 표면상으로 갖추어야할 엄한 격식이 없다. 아니, 타 문학장르가 갖고 있는 요소 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자유로이 잡아다 쓸 수 있다. 시적인 깔끔함, 소설적인 사건 전개, 희곡적인 대사 처리, 평론의 논리전개를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다. 시나 소설도 마찬가지이지만, 일기나 서간문의 형식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일기나 편지글이 수필이란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시에서처럼 모호해서는 안 되며, 소설에서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기나 절정을 설정해서도 안 되고, 희곡에서처럼 극적 반전을 노려서도 안 됨은 물론, 평론에서처럼 추론에 얽매어서도 안 된다. 작가의 내면에서 무르익은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을 일상적인 사물에 비겨 자연스럽게 표출하다보면, 거기서 처음과 중간과 마무리가 서게 마련이다. 엄격한 형식이 먼저가 아니라, 내면에 들어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이 우선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치밀한 짜임과 정교한 표현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수필가는 어느 장르의 문필가보다 더 구성과 표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한다.

IV.치밀하면서도 정교한 글쓰기


1. 치밀한 짜임

수필을 쓰는 데는 구성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는 집을 짓는 데는 설계도가 필요하고, 귀금속을 가공하는 데는 설계도가 없어도 된다는 말이 된다. 아름다운 세공품은 뛰어난 설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원석의 질과 색깔과 윤기를 돋보이게 하면서 개성이 드러난 설계에 의해 명품은 탄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설계는 털끝만큼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치밀해야한다. 작가가 그 작품을 통해 자기의 생각하고 느낀 바(주제)를 아름답게 표현하려하는 수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수필의 구성방법을 세분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왜냐하면 모든 수필에 적용될 수 있는 구성방법은 이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종적 구성(縱的構成)과 횡적 구성(橫的構成)이다. 종적 구성이란 자연적 시간의 흐름,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공간적 사물의 변화를 가리킨다. 종적 구성에 치중하면 속도감이 있어 산뜻하나 가벼운 느낌을 주기 쉽다. 횡적 구성은 자연적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는 회상이나 상상(꿈) 등을 통한 심층묘사(深層描寫)를 가리킨다. 횡적 구성에 치중하면 속도감은 덜하나 진지하고 무거운 느낌을 줄 수 있다.

수필의 구성에서는 소설에서처럼 인물, 배경, 사건을 점차적으로 고조시켜 절정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밟을 필요도, 시에서처럼 기승전결(起承轉結)에 의한 전개나 이미지의 변화, 리듬의 고조 등을 꾀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잔잔한 평이함을 유지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횡을 불문하고 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귀가 맞아 떨어져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도록 해야한다.

수필은 어떤 작품이나 이 종적, 횡적 구성을 활용하고 있다. 기행문이나 일기 형식을 취한 수필은 종적 구성에 치중한 것이며, 현재에서 시작하여 과거로 돌아갔다가 현재로 돌아와 끝맺는 수필은 횡적 구성에 치중한 것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거나, 현재의 상황과 상상이 교차되는 수필은 종횡이 혼합된 것이라 할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수필에서는 어떤 구성 방법을 사용하든 복잡하거나 난삽(難澁)함을 피하고, 단순하고 선명하여 독자들이 쉽게 수용할 수 있게 해야한다.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간다하더라도 심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평이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2. 평이하면서도 정교한 표현

구성이 글의 뼈대라면 표현은 글의 외형이다. 구성이나 표현은 결국에 가서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살리는 데 목적이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주제는 정신이요, 구성은 골격이며, 표현은 피부, 모발, 이목구비 등의 외모이다. 아무리 훌륭한 정신과 뛰어난 골격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함이나 상처투성이의 외모를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이 가진 훌륭한 정신이나 뛰어난 골격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먼저 어휘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상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전문용어나 낯선 말을 남발할 경우 평이성을 잃게 된다. 될수록 최하위개념에 속하는 구체적(감각적)인 어휘를 찾아야한다. 그래야 형상화가 가능하다. 자기가 그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서술해 버린다면, 그것은 넒은 의미의 문학(언어로 표현한 모든 것)일 수는 있지만, 예술의 한 분야인 문학이 아니다.

수필에서는 건조하여 딱딱하거나, 수식이 많아 현란한 문장은 쓰지 않는 게 좋다. 지나치게 간결하거나, 너무 길어 난삽한 문장으로 일관하는 것도 좋지 않다. 가볍고 산뜻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간결한 문장으로 신선한 이미지를 자아내는 게 좋고, 무겁고 진지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비교적 긴 문장으로 덧칠하듯 그려나가는 게 좋다. 글 전체의 호흡이나 주제의 성격에 따라 표현방법과 문장의 길이를 조절해야한다.

수필에서도 다양한 표현방법을 구사할 수 있다.

반복법을 적절히 사용하면 의미의 강조하여 절실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문장의 호흡을 조절하는 효과를 볼 수 있으며, 열거법이나 점층법, 연쇄법을 사용하면 의미의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비교법이나 대조법도 주 대상의 특징을 인상깊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부정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이나 과장법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게 좋고, 꼭 필요하다면 신중 기해야한다. 자칫 격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실감을 감소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법은 참신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관념을 형상화는 데는 비유적 이미지가 최적이기 때문이다. 직유법을 쓸 적에는 참신성을 생각해야한다. 상투적인 직유는 글의 품격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은유법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연결이 자연스러워야한다. 연결이 까다롭거나 부자연스러워 거치적거린다면 수필의 특성인 선명성과 평이성을 잃기 쉽다. 때로는 풍유법을 사용하여 대상을 은근히 꼬집을 수도 있다. 무생물에 생명감을 부여하여 움직이거나 소리지르게 함으로써 간편하게 이미지를 형성할 때는 활유법을, 비인격체에 인격을 부여하여 친근감을 주려 할 때는 의인법을 활용하는 게 좋다. 의성법이나 의태법은 어휘 자체가 감각적이다. 적절히 사용할 수는 있으나 남용한다면 글의 깊이를 감소시킬 수도 있다. 수필에서는 상징적 표현을 피해야한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재고해 보아야할 문제가 아니가 한다.

문장의 흐름에 변화를 주면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표현방법에는 도치법, 설의법 등 있다. 도치법은 문장성분의 배열순서와 관계없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앞에 내세움으로써 산뜻한 변화를 주는 방법이나 이를 계속에서 사용하면 어색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설의법은 독자에게 질문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독자를 글 속에 끌어들이는 방법인데, 수필에서는 이런 연설문조가 아닌 자문(自問) 형식의 은근한 설의법을 써서 스스로 숙고(熟考)하는 모습을 제시한다면 글의 깊이를 더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문장성분 중 일정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여운을 줄 수 있는 생략법도 적절히 활용하면 차분하고 잔잔한 느낌을 더해주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의미에 변화를 주어 모순되게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내는 역설법(逆說法)과 표면상의 의미와 내면상의 의미가 정반대가 되게 표현하는 반어법(反語法)은 시에서 주로 사용하나 수필에도 잘 어울리는 표현방법이다. 이를 잘만 활용한다면 수필의 격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문장의 진술방법으로는 묘사, 서사, 서술, 유추 등을 활용할 수 있다. 묘사와 서사는 배경, 인물, 사건을 그리는 데 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외양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외양을 그리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시된 장면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경의 나무 한 그루, 인물의 말투 하나, 사건에서 양복단추 하나가 떨어지는 것도 의도적이어야 한다. 그림으로는 밀레의 '만종(晩鐘)'이 좋은 예가 된다. 아득한 노을 빛에 가려 보일락말락한 교회의 첨탑(尖塔)과 밭을 배경으로 앞치마 위로 배가 볼록한 아내와 농기구를 잡은 남편이 나란히 서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에서 만약 배경을 지워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볼록한 아내의 배를 날씬하게 고쳐 버린다면 또 어떨까. 그리 된다면 명화(名畵) 밀레의 '만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술은 작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며, 유추는 작가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배경, 인물, 사건을 설명하거나 그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직접 진술하는 서술은 부분적으로는 활용할 수는 있으나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이게 많아지면 예술성이 삭감되기 때문이다. 유추도 논리적으로 짜 맞추는 데만 급급하면 메마른 감을 주기 쉽다.

단락은 의미의 덩어리, 시각적 효과, 글의 호흡 등을 감안하여 나누는 게 좋다. 한 편의 수필이 하나의 보석 상자라면 바닥, 전후좌우의 벽들, 위짝, 열쇠 등으로 나누어 다락을 정하면 된다. 한 단락이 너무 짧으면 글 전체가 산만한 느낌을 주며, 너무 길면 답답한 느낌을 준다. 단락의 길이를 정할 때에도 문장의 길이에서처럼 글의 호흡을 생각해야한다.

수필에는 평이하고 잔잔한 가운데 깊이가 있어야하며, 그윽한 멋과 맛과 향취가 있어야한다. 자기의 경험을 진솔하게 표현한 것만으로 수필이 될 수 없으며, 오랜 사색이나 명상 끝에 얻은 철학적 사유를 표현한 것만으로도 수필이 될 수는 없다. 경험이나 사유를 정교하게 형상화해 놓았을 때 비로소 수필은 탄생한다.

V. 미래를 위한 길닦기



1. 털어 버리고 싶은 금기(禁忌) 몇 가지

수필에서는 비속어(卑俗語)를 금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속된 이야기도 금기시되고 있다. 하기야 예술성은 뒷전으로 밀리고 사회적 관습이 칼을 휘두르고 있는 판이니, 소설도 시나리오도 아닌 선비의 문학 수필에서 원색적인 어휘를 사용하거나 원초적인 사건이 전개된다면 물의를 일으킬 소지는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주춤거리고만 있다면 새로운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작품을 형상화하는 데 꼭 필요하다면, 비속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하고, 관습상으로 속되다고 치부하는 이야기도 활용해야할 것이다. 언어가 갖고 있는 의미의 다중성(多重性)을 감안한다면 비속어가 꼭 속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관습상 금기시되어 있는 욕설이 어떤 말보다 끈끈한 인정을 표현해 낼 수 있음은 물론, 관습상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원초적인 이야기가 어떤 다른 이야기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진솔한 삶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들을 작품 안에서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소설이나 극문학과 다른 성격을 가진 수필에서는 자칫 잘못 다루면 작품을 격을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망쳐버릴 수도 있다.

수필에서는 상징적인 표현을 금하라는 말을 더러 듣는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보조관념의 제시만으로 원관념을 추출해 낸다는 것은 수필의 평이성에 위배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진실을 캐 올리는 데는 상징적 표현 외에 다른 표현방법이 없다. 비유는 연상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기껏 잠재의식을 끌어올리는 데서 그친다. 현대문학이 추구하는 진실의 천착은 잠재의식의 세계를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시는 물론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상징적 표현에 대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수필에서만은 문예사조의 흐름을 도외시해야할 것인가. 수필도 조금은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좀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대화체는 수필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말도 더러 듣는다. 이도 부분적으로는 수긍이 가는 말이다. 대화가 지시적 의미의 전달에 그친다면 지문으로 처리하는 것만 못하고 흥미 위주의 수다떪 정도라면 지루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희곡이나 소설에서처럼 시간이나 공간 건너뛰기, 개성 부여, 함축성 부여 등에 활용한다면 오히려 문학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필은 할머니가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소곤소곤 들려주던 이야기와 같은 성격도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군더더기 없는 대화체는 수필과 잘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다음은 허구(fiction)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수필에서도 허구를 허용해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요즈음 수필계(隨筆界)에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진실을 생명으로 하는 수필에 허구(虛構)를 허용한다는 것은 수필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라는 게 허용불가론자(許容不可論者)들의 입장이요, 문학 자체가 허구성을 지닌 것인데 이를 수용하지 않고는 수필이 문학이 될 수 없다는 게 허용가론자(許容可論者)들의 주장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진실을 표현하는 수단에 대한 해석의 차이, 곧 불가론자에서는 진실은 사실(事實)로만 표현 가능한 것이지, 꾸며 짠 이야기는 꾸며 짠 것 자체가 거짓인데 어떻게 진실을 표현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고, 허용론자쪽에서는 문학적 진실은 현실적 사실(事實)에 있는 게 아니라 문학적 사실(寫實, reality)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문학은 현실에서 소재를 취하지만 그 소재가 작품 속에 들어오면 작품의 한 요소이지 현실은 아니다. 예를 들면 모래와 시멘트로 만든 벽돌로 쌓은 벽은 건물의 한 부분(요소)이지 시멘트나 모래는 아니다.'는 구조주의 문학이론에 잠깐 귀를 기울여볼까 한다. 이 이론을 바탕으로 생각해 본다면 현실 속에서 실재로 있었던 사실도 작품의 한 요소가 되면 본래의 모습을 버리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좀더 엄격히 말하자면, 토씨 하나 더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했다 하더라도 문학작품 안에 수용되면 그것은 이미 현실 속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작품의 한 요소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어떠한가? 작품 안에서 사실(事實)이냐 아니냐를 가린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굳이 그걸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문제는 진실성에 있다. 허구가 허무맹랑하게 꾸며 짠 이야기로 끝나버린다면 진실성은 있을 수 없다. 사실주의 대두 이후, 대표적인 허구의 문학인 소설(fictoin)에서도 그 시선을 현실로 돌려놓은 상황에서 수필에 허구를 허용한들 무슨 큰 일겠는가 싶기도 하다. 허구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에서도 수필이 갖고 있는 진실성, 곧 작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거짓없는 생각을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표출하는 작업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진실성(reality)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도취에 빠져 있거나 재미 위주의 삽화(揷話)들을 얼기설기 엮어놓는 일은 자기 인격의 비하요, 수필문학에 대한 모독이다. 허구의 문제에 대한 논란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2. 되살려 쓰고 싶은 우리 유산 몇 가지

우리 나라 현대수필은 시작부터가 다분히 서구적이다. 독일문학을 전공한 김진섭, 영문학을 전공한 이양하 등에 의해 개척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 수필의 기운이 유입되기도 하고, 우리의 전통적인 것들을 살리려는 노력이 있긴 하였으나, 아직도 서구의 굴레에 메어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 나라 근대문화사에 연유하는 바가 크다. 개화기를 이끌던 계몽주의자들의 주체성을 상실한 서구문물 수용과 그 찬양이 문학에서도 우리의 전통을 단절시켜 버리는 과오를 범하게 한 주범이었다. '헌 것(민족 전통)은 악이요, 새 것(서구문물)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 앞에서 전통이 설자리를 잃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랄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나라의 현대수필이 서구의 영향하에서 시작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제 수필에서도 우리의 전통을 되살려 이어가는 작업에 힘을 모아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전통문학(고전문학) 중 현대에 되살려 쓸 수 있는 요소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조선시대의 한문수필류과 국문수필류로 나누어 일별(一瞥)하려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한문수필류로는 16세기 초, 성현(成現)의 '용제총화( 齊叢話)' 17세기, 유몽인(柳蒙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박두세(朴斗世)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18세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등을 들 수 있으며, 국문수필류로는 15세기 말,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을 필두로 송순(宋純), 정철(鄭澈) 등 사대부의 가사문학(歌辭文學)에서 조선 후기의 실용적 가사와 내방가사(內房歌辭), 계몽가사에 이르기까지 그 양이 방대하다. 또 조선 후기에 서민들이 향유했던 잡가(雜歌)도 무시할 수 없으며, 여류들의 '조침문(弔針文)' '동명일기(東溟日記)'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작품들이다.

한문수필류에서는 작품 속에 잠겨 있는 선인들의 사상과 그것을 형상화한 기법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글 속에 들어있는 선인들의 우주관, 인생관을 눈여겨보아야 하며, 언뜻 보아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인 듯하면서도, 그 속에 작가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녹여 놓은 표현기법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국문수필류 중 가사나 잡가는 노랫말로 쓰이던 것이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다분히 운문적이다. 그러나 내용은 수필에 가깝다. 문학이 운문 위주에서 산문 위주로 변천하는 과도기적 형태라 할 수 있다. 노랫말인 판소리 사설이 소설로 변했다는 것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가. 수필에서도 과도기적 형태인 가사나 잡가의 노랫말을 주목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서민들의 애환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표현기법이나 장단고저(長短高低)를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문장의 호흡 등은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려 쓰고 싶은 요소들이다. 여류들의 글은 엄격히 구분한다면 '조침문'은 제문(祭文)이요, '동명일기'는 기행문에 가깝다. 그러나 형식과는 관계없이 이 두 편의 글은 훌륭한 수필이라 할 것이다. 치밀한 구성, 섬세한 표현은 가히 수필의 극치라 할 수 있다. '규중칠우쟁론기'는 바느질 도구를 의인화한 대화체 글로서, 일인칭시점을 쓰지 않았으면서도 작가의 생각을 암시적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좋은 수필로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의 구성, 표현기법 등을 현대수필에 받아들여 활용한다면 표현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소설에서는 진작부터 우리의 전통문학을 현대문학에 접목시키는 작업이 시도되었고, 김상용, 서정주 등의 시인과 김유정, 채만식 등의 소설가에 의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이에 비해 수필에서는 아직 내세울 만한 성과가 없다. 늦은 감이 있긴 하나, 이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참고] 현대 수필작가들의 수필을 보시려면 수필작가협회 홈페이지(http://www.essay.or.kr/tour/tour_jakpoom.htm)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2002-02-25 22: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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