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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분석]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C.M. 뷔일란트/문학동네
  이영식 [ E-mail ]
  


I.줄거리

[발단]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압데라는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곳. 슈트루치온이라는 치과의사가 왕진을 가가위해 집을 나서는데 자기가 타고다니던 당나귀가 새끼를 낳은 것을 발견하였다. 할 수 없이 당나귀 몰이꾼 안트락스의 당나귀를 10 드라크마에 빌려타고 길을 떠난다. 환자의 집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피곤해진 슈트루치온은 가던 길을 멈추고 당나귀에서 내려 그 그늘에서 쉬고자 했다. 그때 이모습을 본 당나귀 몰이꾼 안트락스는 자신의 당나귀만 빌려 준 것이지 그림자는 빌려준 적이 없으므로 2 드라크마를 추가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어이가 없어진 치과의사 슈트루치온은 당나귀를 빌렸으면 당나귀에 딸려있는 그림자는 당연히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둘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왕진가던 길을 포기하고 압데라 시의 법정에서 누가 옳은지 시비를 가리자고 했다.

[전개]

두 사람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은 시의 재판관 릴리피데스는 옳고 그름을 가리기에 매우 어려운 사건임을 직감하고 둘 다 조금 양보하라는 판견을 내 놓는다. 즉 "이런 경우에 당신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서로 화해하는 것이오. 당나귀몰이꾼 안트락스 씨, 그림자는 단지 그림자이니 그냥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시지요. 그리고 슈트루치온 씨. 당신은 그 대신 반 드라크마를 지급하도록 하시오. 이렇게 조금씩 양보를 하면 서로가 좋지 않을까요?"라고. 서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두 사람이 이러한 타협안에 귀를 기울일리 만무하다. 사건은 치과의사를 옹호하는 피지그나투스와 당나귀 몰이꾼 편을 들기로 작정한 폴리포투스 변호사가 개입함으로 해서 더욱 크게 번져갔다.

둘은 자신의 입장이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도시의 사람들을 끌어 들일 필요를 느꼈다. 치과의사는 자신이 속해있는 구두수선 조합(치과도 무엇인가를 고치는 직업이기에 여기에 분류됨)에 자신의 입장을 호소하자 조합장 프리임이 발벗고 나섰다. 이 문제는 자신이 속한 조합의 권익과 관련이 있다고 본 것이다. 한 편 당나귀 몰이꾼은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그 도시의 두 신전의 사제 중 한 사람인 아가티루스에게 줄을 대었다. 그는 기꺼이 당나귀 몰이꾼 편이 되어주고 시의 유력인사들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치과의사쪽은 그 도시의 또다른 신전의 사제장인 슈트로빌루스에게 찾아가 호소했고 아가티루스를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던 그는 기꺼이 치과의사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건은 상소되어 2심을 거치게 되었다. 법정은 당나귀 그림자 사용에 관한 실정법은 없지만 인류의 본성에 기인하는 법 원리에 따른다는 근거를 내세워 그림자는 장소 여하를 막론하고 만인에게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나귀 몰이꾼의 고소를 기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당나귀 몰이꾼의 문제가 아니라 압데라시 전체의 문제였기에 판결에 굴복할리 없었다. 당나귀 몰이꾼 측은 압데라 입법의회에 이 문제를 항소하기로 했다.

양측은 서로의 입장을 지지해줄 세력을 확보하기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고 마침내 압데라 시민들은 치과의사편인 "당나귀 그림자 당"과 당나귀 몰이꾼 편인 "당나귀 당" 두패로 쫙 갈리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어 내걸고 압데라 시민이면 그 누구도 중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가족이라도 남편은 당나귀 그림자 당에, 아내는 당나귀 당의 편을 들기도 했다. 두 당파의 세력의 핵심은 도시의 두 신전을 중심으로 뭉쳤는데 당나귀 그림자 당은 개구리를 섬기는 라토나 신전을 중심으로, 당나귀 당은 염소를 숭배하는 야손신전을 중심으로 뭉쳤다. 당나귀 그림자의 사용권에 대한 치과의사와 당나귀 몰이꾼의 사사로운 갈등이 드디어 두 종파의 갈등으로 비화되고 압데라 시민 전체의 갈등으로 심화된 것이다.


[위기/절정]

이렇게 두 패로 나뉘어 온 도시가 술렁거리고 간간히 물리적인 마찰마져 있는 가운데 드디어 이 사건은 입법의회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양측은 서로의 입장을 팽팽하게 내세웠다. 재판은 합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당나귀 그림자 당쪽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싶었다. 당나귀 몰이꾼이 당나귀를 소유하는 이상 당나귀 그림자도 소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판결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만약 입법의회가 당나귀 그림자 당이 옳다고 판결하게 되면 그야말로 압데라는 두 쪽으로 갈려질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결말]

이 재판은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문제의 당나귀를 마굿간에 구금하고 있던 관리가 제안하기를 이번 사건의 주인공은 당나귀인데 그를 재판에 참석시켜야하지 않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의원들은 옳게 여겨 그 당나귀를 끌어 오도록 지시한다. 압데라 시민들은 영문 모르고 잘 치장되어 끌려가는 당나귀를 보자 오늘의 사건의 주범이 저 당나귀라고 외치며 달겨들어 갈기갈기 찢어가버린다. 보고를 받은 재판정은 기뻐서 환호했다. 주인공이 없는 재판은 더이상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건 자체를 백지화 한다. 이 사건으로 아무도 손해 본 사람은 없었다. 치과의사는 일하지 못한 대가를 받게 되고 당나귀 몰이꾼 역시 일하지 못한 대가로 몇 마리의 당나귀를 시로부터 받는다. 모든 비용을 시의 비용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II.공간구조와 주제에 대한 논의

[야손대 라토나]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의 공간 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뚜렷하다. 온 도시 전체가 야손신전과 라토나 신전을 중심으로 갈라진다. 작가는 두 신전에 대한 묘사를 따로 길게 지면을 할애하여 부연설명하고 있다. 야손 신전과 라토나 신전은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전자는 염소를 신으로 섬기고 후자는 개구리를 신으로 섬긴다. 전자의 수석사제인 아가티루스는 매우 세속적인 인물로 음악과 술과 춤과 여자를 좋아한다. 반면 후자의 제사장인 슈트로빌루스는 매우 금욕적이다. 야손 신전은 화려하고 축제적 분위기에 젖어 있으며 시민들에게도 인심을 많이 베푼다. 반면 라토나 신전은 초상집 분위기와 같이 엄숙하며 기울어져 가는 세도가 처럼 인기가 없고 그곳에 가서는 오히려 헌금을 내야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압데라 시민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점에서는 라토나 신전과 버금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야손신전은 당나귀 몰이꾼 편인 당나귀 당을 지지하고 라토나 신전은 치과의사 편인 그림자 당을 지지한다.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두 당파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다. 이처럼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의 작품 구조는 두 신전이라는 공간구조를 뼈대로 하여 배열되고 있다.

[선악의 대립이 아닌 힘의 대립 구조]

공간구조에서 보듯이 저자는 두 공간을 선과 악, 적군과 아군, 나와 타자와 같은 식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주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이다. 두 신전은 압데라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하는데 공통점이 있지만 어느 종파도 선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단지 힘의 논리에 의한 대결 구도가 있을 뿐이며 작가가 첫 마디에 묘사하듯이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압데라는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곳"의 맥락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어리석음의 종교적 상징으로 등장시킨다.

전통적인 문학작품에서 성(聖)과 속(俗)을 구별할 때 종교는 대부분 성(聖)을 세상은 속(俗)을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의 공간구조는 매우 혁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더이상 종교는 성스러움을 대변하지 못한다. 선악을 구별하는 진리의 표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힘의 논리에 의하여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속세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압데라 시민에게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힘이 정의의 기준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작가는 미약한 목소리지만 작품 속에서 진리의 기준으로 합리성을 들고 나온다. 사실 합리적인 판단으로 볼 때 그림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에 어긋난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이라는 것이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작가는 날카롭게 통찰한다. 압데라 시민이 딱 절반으로 나누어져 있는 상황에서 논리적이니 합리적이니 하는 것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 사실 양쪽 모두 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입장의 대결 속에서 "합리"란 별 의미가 없다. 머리는 설득될지 모르지만 가슴은 이성을 따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결국 압데라 시에서의 정의란 누가 더 큰 파워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일 뿐이다.

작가는 이처럼 정의의 절대적 기준이 무너진 사회에서 재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문제를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해결은 참으로 엉뚱한데서 비롯된다. 문제의 원인제공자였던 당나귀가 죽어 없어짐으로써 막을 내린 것이다.

[선악의 기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

작가 크리스토프 마틴 뷔일란트(C. M. Wieland)는 1733년 남부 독일 오버홀트하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의 가정의 신앙적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작품을 썼으나 후일 계몽주의 사상에 접하면서 문학적 성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흔히 문학사에서 계몽주의의 철저한 실천자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계몽주의란 1720-1785년의 범 유럽적 정신사의 한 시기로서 비판적인 인간의 이성과 사유의 힘으로 근대적인 문화와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합리주의적인 정신운동사조이다. 윤시향에 따르면 계몽주의 문학은 관용을 사회적인 덕성으로 표방하고 세계시민사상을 고창햇으며 또한 문학은 유용하고 즐거움을 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계몽주의가 종교 중심의 중세적 인간관을 거부하고 인간의 합리적 판단 능력에서 절대적 진리 기준을 찾아 보려는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뷔일란트는 그 것의 한계를 너무나 명확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보여준 작가라고 보인다. 계몽주의로 계몽주의 세계관을 비평했다고할까! 절대적 가치 기준이 무너진 사회에서 정의란 결국 힘이 정의이며 그 힘들이 팽팽하게 대립된 구도 속에서 합리적 판단이란 얼마나 나약한 기준인가 하는 것을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뷔일란트의 예언은 맞아 떨어진다. 당시 가장 학문이 발달하고 기독교 국가이며 일등 국민으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독일이 세계 2차 대전의 핵심적인 주동자이자 민족을 우상화해서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 한데까지 이른 것이 합리주의의 종말인 셈이다. 2차 대전 이후 인류에 대한 낙관론은 철퇴를 맞은 것이며 인간이 결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아님을 비싼 대가를 치루고야 배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참된 기준은 무엇일까?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은 독자들을 이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세운다.

2002-02-13 17: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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